우리 가족 여행기 : 문혜원
동생이 서울대학교 동창회보에 올린 고국 방문기입니다.

문혜원
7년만의 한국 나들이; 홈커밍 데이 참가와 형제들 동반 고향집 방문기
이번 10월 모처럼 한국에 다녀 왔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간 것은 어머니 돌아가신 7년 전이었다. 올 초부터 의대 졸업 40 주년이란 말의 무게에 한국에 방문하기로 계획했었다. 6월 초엔 벌써 의대 동기들이 계획한 2박 3일의 짧은 일본 여행이 있었는데 우리 부부는 일본이 처음인지라 따로 한 열흘 추가해 일본 주요 도시를 돌아 보았으니 같은 해 일본과 한국을 돌아 보게 된 셈이었다.
10 월에 관악에서 하는 홈 커밍 데이 행사에 처음으로 참가할 계획을 했고, 때마침 맏형 (의대 69 학번, 흉부외과, 미국서 활동 후 작년 말로 은퇴하심) 동기들은 졸업 50 주년 기념여행을 한국에서 하는 계획과 겹쳤고, 그래서 형제들끼리의 가족 재회도 계획했다. 바로 위 둘째 누나도 작년말로 엘에이서 하던 치과의원을 접고 남편이 아직 개원의로 일하는 서울로 와 있던 터라 다들 시간대가 맞아 우리 4남 2녀 중, 한 형만 제외하고 다같이 모이는 형제들 고향 방문 여행도 했다.
마침 관악 캠퍼스는 올해가 이전 50 주년이라 특별히 의미를 두었는데, 한국에 사는 둘째 형 (법대 74 학번) 은 자기가 50주년에 가장 가까운 세대라고 50주년의 의미를 두어 전체 홈 커밍 데이 행사는 물론, 그날 미주동문들만을 위해 따로 마련된 점심 정찬에도 같이 참여했다. 의예과 이후 관악 캠퍼스를 떠났으니 45년 정도만에 들른 캠퍼스는 많이 변해 있었는데, 옛날 도서관, 학생회관 근처 정도만 옛 모습을 알아볼 정도였다. 홈 커밍 배너 밑에서 서울대 동문 삼형제가, 또 같이 간 둘째 누님과 병리과 의사로 은퇴하신 큰 형수님, 간호사출신 우리 아내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들 4 형제 중 셋이 서울대를 나왔으니 참 드문 성취라 할 만 한데도 왠지 우리 형제들은 그런 성취감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던 것 같다.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에 차례로 하나씩 올라 와 적응해야 했던 시골 아이들의 눈에는 위로 뻗친 사닥다리는 길기만 했고, 게다가 미국으로 건너와 적응해야 했던 맏형, 둘째 누나와 나는 더욱 긴 도전의 세월을 살아 왔기에 언제 이런 형제들끼리의 여행 같은 모임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게다. 그래도 이제는 졸업 40년, 50년 지난 시점에 있는 자신들을 보고, 그래도 아직 운좋게,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형제들 의 모임인 셈이었다. 형제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을 많이 떠올리게 해 다양한 기억들을 되살렸는데, 인상적인 건 각자 기억들이 선택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형제들은 시골 학교에서는 모두 우등생들이었지만, 서울에서는 그냥 시골 출신, 더 구체적으로는 ‘강원도 감자바우’들로 통했기에 늘 변방인, 외부인같은 기분이니 그나마 공부, 학업에 집중해 열심히 공부해 오던 공통된 기억들이 있었다. 형제들 각자의 경험은 하나하나 독특한 삶의 기억이었고 때로는 마치 누가 더 고생했는가 경쟁하는 듯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큰 누나가 교회 인맥을 통해 미리 마련해 놓은 미니 밴으로 우리가 자란 동해시의 옛 집으로 찾아가 보았다. 당시 자란 동네는 일본군국주의가 한반도에 두번째로 만든 화학공장 (당시 북삼화학, 나중에 동부그룹의 모체가 된 삼척산업)의 사원 사택이었는데, 50여 채 되는 사옥 중 우리가 자란 관사 2호는 1호 관사와 사원 합숙소와 더불어 강원도가 지정한 문화재로 되어 보호받는 집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의 건축양식 등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이유이다. 이 동네 출신으로 강원도 도지사가 된 분 시절에 이뤄진 일이라 들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내려와 여기를 평생 직장으로 삼아 일하시고 우리 육형제를 기르신 뒤 은퇴하고 나서야 남은 밑의 두 자녀들과 같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돌아보면 삼형제가 서울대를 다닐 수 있었던 공은 우선 맏형에게 돌려야 하겠다. 유리 천정을 깨는 개척자는 뒤를 잇는 형제들에게 나도 못할 게 없지 않냐 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둘째 형은 맏형의 성취가 있었기에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온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류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법대에 진학한 멋진 기록을 보였다. 형은 나중에 투자 회사쪽으로 진로를 택해 지금껏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셋째 형은 청소년기 방황을 거쳐 나름대로 변화의 체험 후 신학을 전공, 목사의 길로 갔다. 큰 누나는 자신의 길을 찾아 직업이 빠른 교육대학을 나와 일찍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 교장을 거쳐 몇년 전 은퇴하였다. 바로 위 둘째 누나는 간호대학을 나와 나중에 치과의사가 되고 미국서 일하다 작년 말로 은퇴하였다. 막내인 나는 고교 평준화, 소위 뺑뺑이 세대로 일류 고등학교를 목표할 환상이 깨져 혼자만의 독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두 형들의 본을 따 이과와 문과를 왔다갔다하다 결국은 의대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함경도 회령 출신으로 일찍 이화 고녀에 유학했지만 삼팔선이 갈리며 고향으로 부터의 지원이 끊기며 대학진학이 희미해졌고, 하나뿐인 오빠는 일본 게요 의대에 다니시다가 해방 후 옮겨 와 서울의대 2회로 졸업했는데, 어머니에겐 큰아들이 오빠같은 길을 갔으면 하는 염원이 있으셨을 것 같다. 삼촌은 일찍 미국으로 유학, 나 중에 쟈메이카에서 평생 의사로서 삶을 끝내셨다.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정신과 수련 시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융 분석가이신 이부영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레지던트 수련 기간 중 받던 지도분석 시간에 나에 대한 한 마디 평가, <뭔가 암중 모색하는 중인 것 같다> 는 지적이 내 기억에 늘 남아 있는데, 40 여년 탐색 끝에 내가 뭘 찾았는지 가서 보여 드리고 싶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영성과 심리학이 통합된 캔 윌버의 통합심리학인데, 그의 방대한 저술들을 접한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을 체험했다. 그의 최근 저서의 번역판인 <빅 홀니스>를 선물로 들고 갔다. 노 교수님께서는 꼭 읽어보마 약속하셨다.
또 하루 저녁은 우리 동기 여덟 명과도 같이 저녁을 했는데, 나온 친구들 중에는 의예과 시절 집중적으로 에릭 프롬 저술들을 같이 공부한 서국희, 박수룡 친구들은 뒤에 같은 정신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의 공부가 전공 선택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한문에 능한 다른 친구 김임렬 (정신과 전공)은 한시로 우리의 만남을 멋지게 표현해 주었고 또 김철환(가정의학 전공)은 그 한시를 최근 배우기 시작한 붓글씨로 써서 우리에게 공유해 주었다.
한국 여행 중 며칠은 같이 간 김기형 선배 (상대, 75) 와 우리 부부 둘이 따로 며칠 특별 여행을 했는데, 송광사에서 하루 템플 스테이, 하루는 순천시에 머물며 김선배의 지인의 안내로 순천 국가 공원, 영화 촬영소 그리고 보성의 차농장을 돌아 보았고, 서울에 와서는 진관사 근처의 한옥마을에 이틀 머물러 보았다. 지자체 이후 시골은 이제 시골 기분이 아니라 깨끗하고 교통 편하고 나름대로 특색있는 관광지로 돼 있었고, 특별히 서울에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이런 중소 도시에 살 만하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KTX 로 두 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편리한 거리였다. 송광사에서는 법정 스님의 수련처인 불일암까지 “무소유 길”을 걸어가며 걸음걸음 무소유 정신을 묵상해 보았다. 소유에 대한 바른 태도, 집착이 없는 초연한 태도로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 현대의 물질, 소유에 끌려가기 쉬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 모토가 됨을 느꼈다. 은퇴하신 맏형님, 두 누님을 보며 나에게 앞으로 남은 삶, 특히 다음 10 년이 나에겐 이 삶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뭔가 할 기회임을 느꼈다. 우리는 누구나 매 삶에서 어떤 독특한 경험을 갖고 가고, 동시에 독특한 역할로 이 세계에 뭔가 영향을 끼치고 가는데 어떻게 마지막 장을 살 것인가 하는 큰 물음을 안고 돌아온 보름간의 한국 여행이었다.
동시에 봄에 한 일 본여행에서의 기억이 대비되었는데 한국에서 뭔가 더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느꼈는데, 이제는 한국 사람으로서 이무런 꿀리는 마음 없이 편하게, 그냥 이웃나라인 일본을 여행 할 수 있었던 기분, 새삼 우리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드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돈 없는 시골 감자바우들도 거의 공짜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한 서울대학교에 대한 고마움, 또 당시 강원도 출신들에게 주던 금강장학회의 혜택을 받은 두 형님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형제들 모두가 우리가 받았던 많은 혜택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우러 나오는 그런 여행이었다. 특히나 홈커밍 행삿날 뒤에 김종섭 총동창회 회장님께서 삼익악기 본사로 초대한 만찬은 아주 성대했고 음악회까지 준비해 주셔서 미국에서 간 모든 동문들에게 모교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느끼게 해 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서울대 동창회 신문>
필자 소개 : 이 글을 쓰신 분은 현재 LA 한인타운에서 정신 신경과 병원을 개업 중인 김자성 전문의로 본교회 문혜원 장로님의 친동생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