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무화과나무
- 종려

- 1월 6일
- 2분 분량

잎이 무성하게 자란 한 무화과나무는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받아 말라 버렸다. 이유는 예수님이 시장하셔서 열매가 있나 하고 찾아보았으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고 마가복음은 밝히고 있다(막 11:12). 아직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열매 없다고 저주를 받으면 그 나무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나무를 저주로 말라죽게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이면 그까짓 과일 몇 개 구하기란 식은죽먹기였을 텐데, 이 대목은 참으로 이해가 안 가는, 오해하기 쉬운 성경절 중 하나였다. 사랑이 많은 온유하신 주님이 그분답지 않게 어째서 한낱 먹거리 때문에 그런 과격한 언행을 하셨는지, 물론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비유로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지만, 선뜻 이해가 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랜 신앙 연륜이 쌓이면서 나는 그 사건에 점점 공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신앙 공동체가 그 당시 유대인들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어떤 그룹이든지 대개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옛날 아이성 전투를 앞둔 이스라엘에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아름다운 시날산 외투와 은과 금을 숨긴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지막 영적 전투를 대비하고 있는 재림교회에도 교회 자금을 횡령하는 어떤 행위가 존재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 본인들이 제일 하나님의 명령을 잘 준수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선민사상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했다면 오늘날 마지막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우리 또한 구원을 이미 획득한 듯한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있다.
식물이 씨앗에서 싹터서 점점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잎이 무성해지는 것은 자연 현상이지만 그 자체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성과물, 그것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은 바로 열매일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무화과나무라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러한 품성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에 실패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와 각종 거창한 행사를 벌여 놓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돈에 눈이 멀어 있었다. 제사를 핑계로 제물이 될 짐승들을 거래하면서 톡톡히 이윤을 챙겼다. 이것을 아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그 기구들을 둘러엎으시는 폭력을 행사하셨다. 이것도 예수님답지 않은 모습이다. 예수님이 그토록 흥분하신 것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기 떄문이다.
이제 곧 잡혀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걸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형편을 보시고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 각자는 얼마큼이나마 느낄 수가 있을까.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교인이 교인답지 않을 때 받을 저주는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받은 저주가 아닐까 싶다.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즉 일단 멸망한 후에는 재기의 기회가 없다는 선언이다. 우리도 아주 그럴 듯한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사업들이 바쁘게 돌아가지만 그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말은 그럴 듯하게 신앙으로 포장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다른 우상에게 향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는 중간 지대가 없다. 나냐 우상이냐에서 택하라고 하신다. 이 점이 예수님을 그토록 분노케 하고 힘들게 하신 게 아닐까. 그의 피로 사신 영혼들이 틀림없는 멸망의 길을 향하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새해를 맞으면서 나 자신부터 성찰해 보며 무화과나무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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